조슈번 무엇인가?
먼저 '번'의 의미부터 알아보자.
번이란 일본에서는 역사 용어로 막부 시대의 일본에서 영주가 다스리는 영지를 의미한다.
영지 내에 한해 수확되는 쌀이 만 섬이 넘는 경우 번으로 분류되었다.
대체로 하나의 나라보다는 조금 작은 편이다.
조슈 번의 위치
조슈 번은 지금의 야마구치현에 위치했던 에도시대의 4, 5위 안에 드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큰 번이다.
조슈 번의 역사
도자마 다이묘 인 모리 가문에서 조슈 번을 다스렸다.
에도 막부 말기(1840년경) 조슈 번의 인구는 70만 명으로, 당시 일본 전체의 인구는 3500만 명 정도였다.
그리고 이 시기 실시한 조사 자료가 남아있는데 실질적인 경제 규모는 152만 석이었다.
조슈 번의 사무라이들은 옛부터 학문을 중시 여겼는데, 그것은 중국, 조선과 같은 대륙과 가까워서 중세 이전부터 한학(유학)이 흥했고 국제 관계에 대해서도 민감했기 때문이다.
다이묘였던 모리 가문도 학식을 갖춘 인물이 많아 많은 기록을 남겼고, 그 가신도 자서전을 쓸 정도의 교양이 있었다.
이런 교양과 학식을 갖춘 번은 일본 전국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또한 조슈 번은 기록과 문서를 중시해서, 지방에서 물품 구입한 사소한 영수증 하나까지 모두 중앙 행정 기관에서 보관하는 등, 과거 문서를 뒤져보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도록 엄청난 문서 기록과 관리 시스템이 있었다.
조슈번은 존왕양이 사상(왕을 숭상하고 외세를 배척한다)이 가장 자리를 잘 잡았던 곳이다.
덴노의 명으로 1863년 7월 20일 홀로 서양 무역선을 공격했다가 무참히 패배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조슈 양이파가 전부 제거되며 실권을 잃었다.
1864년 7월 8일 조슈 번의 과격 유신지사들은 교토에 방화를 해서 천황을 되찾자는 과격한 행동을 하게 된다.
이는 곧 경비부대에 발각되고 또 다시 다수의 유신지사를 잃게 된다.
이성을 잃은 조슈 번은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미리 기다리고 있던 막부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조적(조정의 적)으로 낙인 찍힌다.
조적 토벌령으로 제1차 조슈정벌이 발생하였고 조슈 번은 굴욕적인 평화 조약으로 겨우 연명하게 된다.
1차 조슈정벌 이후 조용히 힘을 키운 조슈 번은 상인이자 정치가이기도 했던 사카모토 료마를 통해 원수와도 같았던 사쓰마와 동맹을 맺게 된다.
결국 이어진 2차 조슈정벌을 막아내고 옛 막부와 유신파의 전쟁이었던 '보신전쟁'까지 승리로 이끌며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세력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슈 번자체는 폐번치현(번을 없애고 전국을 일원화한 일본의 정책)으로 야무구치 현으로 거듭나며 사라지게 되었다.
현대 일본 보수 정치의 발상지 - 야마구치 현
야마구치 현은 도쿄 다음으로 일본 총리를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역사적 배경 덕분에 상당히 보수적인 지역이다.
20세기 초반까지 이토 히로부미가 세운 입헌정우회가 매우 지지받은 지역이며 이후로 자유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이다.
아직 조슈 파벌이 일본 정치계에 남아 있는데 아베 총리도 조슈 파벌이다.
(아베의 출생은 도쿄도 이지만 본적지가 야무구치현이며 그의 국회의원 지역구도 야마구치현이다.)
2014년 중의원 비례대표 선거에서 여당인 자민당, 공명당은 야마구치현에서 61.2%를 득표해 일본 1위를 기록 하였다.
그 외 다른 우익 정당의 득표율을 합치면 거의 75%에 달한다고 한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초대 조선 총독
미우라 고로- 을미사변의 주범
소네 아라스케 - 2대 조선 통감
하세가와 요시미치- 2대 조선 총독
고다마 겐타로 - 노기 마레스케의 절친이자 대만 총독이자 러일전쟁의 만주군 총참모장
등등